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주 이씨 (문단 편집) ==== 번성 ==== 이언적은 [[조선]]시대 최초의 철학적 사유인 태극논쟁을 벌인 [[성리학]]의 태두로, 이선기후설(理先氣後設)과 이기불상잡설(理氣不相雜說)을 강조하는 사상을 확립했으며, 이는 [[이황]]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근간이 되었다. 동시에 그는 [[의정부]] 종1품 좌찬성, 이조판서, 예조판서, 대사헌, 대사성, 한성부 판윤, 경상도 관찰사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사후 영의정으로 증직된 정치가이기도 했다. 학문적 업적으로 그는 동방5현이자 동국18현으로서 [[문묘]]에, 정치적 업적으로 [[명종(조선)|명종]]의 배향공신이 되어 [[종묘]]에도 모셔졌다. [[문묘]]와 [[종묘]]에 모두 이름을 올린 사람은 [[이언적]] 외에 [[이황]], [[이이(조선)|이이]], [[송시열]], [[박세채]] 뿐이다. 바로 이 [[이언적]]이 배출됨으로써 그 후손들은 그를 중시조로 삼고, 자신의 능력 외에도 그의 이름 덕분에 명문대가(名門大家)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. 동시에 그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. 그러나 영남을 기반으로 둔 [[남인]]계열인 까닭에, [[인조반정]] 이후 [[서인]] [[노론]]계열에 정권을 내줌으로써 당상관에 오른 이가 매우 드물게 되는 아픔을 겪었다. 채제공의 뒤를 이어 남인의 수장이 된 [[이가환]]이 신유박해로 사망하면서 치명타를 입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